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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조화된 왕실의 정원, 창덕궁을 만나다

pingmoney 2025. 5. 21. 21:13

창덕궁(昌德宮)은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궁궐이다.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된 종합 환경디자인 사례이면서 동시에 한국적인 공간 분위기를 읽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15세기 초에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이궁으로 조성되었으며, 그에 따라 애초의 건립 목적이나 도성 내에 자리한 입지도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건축사에 있어 조선 시대 궁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후원의 조경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왕실 정원으로서 가치가 높다. 이 글에서는 자연과 조화된 왕실의 정원, 창덕궁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자연과 조화된 왕실의 정원, 창덕궁을 만나다
자연과 조화된 왕실의 정원, 창덕궁을 만나다

창덕궁에 대한 소개

창덕궁은 수세기 동안 한국의 건축과 정원, 조경 설계, 관련 미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창덕궁은 아름다운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세련된 건축적 가치를 보여 준다. 복합 건축물인 창덕궁은 극동 지역의 건축과 정원 설계의 우수 사례로서 주변 환경에 조화를 이루고 있고, 해당 지형에 적합하게 지어졌으며, 자생종의 수목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탁월하다고 평가된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1405년, 태종(재위 1400∼1418)은 수도를 다시 한양으로 옮겼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창덕궁은 풍수지리에서 서울 북쪽을 수호하는 산인 응봉산 자락에 있는 58㏊의 불규칙한 직사각형 지대에 있다.

궁궐의 건축을 위해 만든 궁궐조성도감은 전통적 설계 원칙에 따라 업무용과 주거용 건물로 구성된 복합 건축물을 지었다. 창덕궁은 전면의 궁궐, 후면의 비원, 세 개의 문과 더불어 정사, 주거, 의전을 위한 세 개의 건물 등으로 구성된다. 주 건물들(인정전, 선정전, 희정당, 대조전 등)은 1405년에 완공되었으며, 이후 7년 동안 나머지 주요 요소들이 추가되었다.

창덕궁은 1462년에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에는 한양의 다른 중요 건축물들과 함께 불에 타 허물어지기도 했다. 선조가 1607년에 창덕궁의 재건축을 명하여 1610년에 완료되자 창덕궁은 정사를 돌보고 임금과 왕비가 거주하는 곳이 되어 258년 동안 그 기능을 유지하였다. 이후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재건축 작업은 항상 원래의 설계에 충실하게 따랐다.

2층으로 된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1406년에 지어졌고, 화재를 입어 1607년에 재건축되었다. 돈화문과 동일한 양식으로 지은 1층짜리 인정문은 정사를 돌보는 데 쓰이던 정전으로 연결된다. 1592년과 1803년에 화재로 파손되었던 웅장한 정전인 인정전이 바로 그 안에 있다. 인정전은 두 겹의 단 위에 지은 2층 건물로, 네 개의 거대한 기둥들로 지탱되고 있다. 인정전 안의 조각을 새긴 천장 보개 아래 연단에는 정교한 어좌가 놓여 있으며, 그 용마루에는 독수리와 용 같은 수호 동물이 조각되어 있다. 위로 올라가는 주 계단은 신화 속 수호 동물들의 조각상이 장식되어 있다. 인정전 동쪽에는 왕이 일상 업무를 보던 선정전이 있는데, 푸른 기와를 올린 소박한 건축물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소박한 건물인 희정당이 있는데, 이곳에는 왕의 침전과 신하들의 침실이 있었다.

근처의 대조전은 왕비를 위한 건물이다. 대조전의 정원은 잔디, 나무, 꽃, 연꽃 연못, 수목을 배경으로 한 정자 등으로 꾸몄다. 

역사적 배경

조선왕조의 초기에 수도는 개성과 한양(현재의 서울)으로 번갈아 이전되었다. 조선의 3대 왕 태종은 그의 아버지 태조의 뜻에 따라 1405년에 한양을 수도로 정했다. 기존의 경복궁이 길하지 못하다고 여긴 태종은 새로운 궁궐의 건축을 명하고 이를 창덕궁이라 이름 붙였다.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궁궐 건축을 관장하는 직책이 만들어졌고, 건축 공사는 전통적 개념의 원칙, 특히 전조후시와 삼문삼조의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또한 삼조제도, 즉 앞쪽에 신하들의 공간인 외조, 중앙에 임금이 정무를 보는 치조, 뒤에 왕의 처소와 왕비의 처소인 연조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랐다.

궁궐은 주요 건축물과 비원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정원은 잔디, 나무와 꽃, 연못으로 꾸몄으며, 숲이 우거진 후면 가까이에 정자를 세웠다. 주요 건물은 1405년에 완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너무 좁다고 생각해 이후 7년 동안 중요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한다. 1462년에는 북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 있는 중요한 건물들과 함께 궁궐도 불태워졌다. 7년 동안의 전쟁이 끝난 후 창덕궁은 폐허가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의 왕 선조는 1607년에 궁궐의 재건에 착수했으며 1610년, 선조의 왕위를 이은 광해군 때 공사가 끝났다.

궁궐은 다시 통치의 중심지이자 왕실의 거주지가 되었으며, 청의 침략에 의한 병자호란(1636), 프랑스 함선이 강화도를 점령한 병인양요(1866), 미국 군대에 의한 신미양요(1871)에 걸쳐 주로 화재를 입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258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럼에도 재건축할 때마다 원래의 설계를 충실히 따랐다. 수세기 동안 궁 전체에 걸쳐 몇몇 건축물이 추가되었다. 1828년 순조는 전아(典雅)한 스타일의 건물을 짓게 했고, 1846년 헌종은 궁궐 외딴곳에 낙선재라는 이름의 왕실 거처를 지었다. 마지막으로 추가된 건물은 1921년에 세운 선원전인데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처음에는 인정전과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궁궐의 북서쪽 방향에 있는 덜 중요한 장소로 이전되었다.

보존 및 관리체계

창덕궁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궁궐 전 영역과 주요 건물 및 식재가 국가 지정 문화재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또한 문화재 및 보호구역 경계로부터 100m 이내 지역은 문화재보호법과 종로구 조례에 의거 ‘역사문화환경보존지역’으로 보호받고 있으며, 따라서 해당 구역 내 모든 건설 행위에 대한 사전 심의가 의무화되어 있다. 이외에도 창덕궁 후원은 자연환경보전법에 따라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청은 창덕궁의 보존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정부기관으로 창덕궁의 건물 및 시설물 보수정비, 발굴, 예산 지원 등의 업무를 총괄한다. 또한 40명가량의 직원들이 배치된 창덕궁관리소는 현장에서 직접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상시 모니터링이 진행되고 있으며 3, 4년 주기로 전문가들이 정밀 모니터링을 실시한다.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도시교통과, 문화재과가 협력하여 창덕궁 주변 지역을 관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주기적으로 기본 경관 계획, 지구 단위 계획을 수립하여 주변 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방안 및 사업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창덕궁의 보존 관리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창덕궁의 문화재 수리는 해당 분야별 문화재수리기술자 자격시험에 합격한 공인된 문화재수리기술자가 진행한다. 창덕궁 보존의 가장 큰 위협 요소는 목조건축물의 화재 위험이다. 이와 관련해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5대 궁 및 종묘 종합경비시스템구축사업을 추진하여 화재를 비롯한 문화재 훼손과 재난에 대비하고 있다.

 

참고 : By 익명 - Museum of Donga university,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7520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