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 (역사 정통성, 왕실 계보, 문화 계승)
발해는 고구려 멸망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등장한 강력한 국가로,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했다. 본문에서는 발해의 건국 배경, 고구려 정통성 계승의 역사적 의의, 정치·문화·제도 속에 담긴 고구려적 요소를 중심으로 그 계승의식을 심층 분석한다.
대조영과 발해의 건국, 고구려인의 새로운 나라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 대조영이 건국한 국가로, 처음에는 진국이라 불렸으며 후에 당나라에 의해 발해로 불리게 되었다. 고구려가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유민들은 각지로 흩어졌고, 특히 동북방 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 귀족 출신 중심의 자치적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대조영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대조영을 고구려 장수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며, 《신당서》에서도 그의 가문을 고구려인으로 명시한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새로운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의 정치적·문화적 후계자임을 공공연히 천명한 사례라 할 수 있다. 건국 초기부터 발해는 이러한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내세웠고, 이는 외교와 내부 제도 정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발해의 초기 영토는 고구려의 북방 영토 대부분을 포함했으며, 이후에는 숙신, 말갈 등을 통합해 다민족 국가로 성장했다. 하지만 주도권은 철저히 고구려 유민 출신 귀족에게 있었으며, 이들은 고구려식 행정제도와 군사 조직을 도입하고 국가 통치를 수행했다. 발해는 단지 고구려인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고구려의 부활이자 동북아시아 정세를 재편하려는 강력한 시도였다.
고구려 정통성의 계승과 대외 인식
발해의 고구려 계승의식은 단순한 내부 정체성에 그치지 않고, 외교적 수사와 실질적 제도로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발해가 스스로를 ‘해동성국’이라 칭하며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발해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명확히 인식시키려 했으며, 일본 등 외국 사절과의 외교 문서에서도 이 같은 자부심을 나타냈다.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은 자신들을 "고구려의 유민"이라 밝히며, 국서에는 "우리 조상 고구려는 강성한 나라였고, 발해는 그 후손"이라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고구려의 역사적 정통성과 국제적 위상을 이어받고자 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더불어 발해는 고구려의 왕실 제도와 예법, 의복 양식, 제례 형식까지도 적극 계승함으로써 문화적 측면에서도 그 전통을 유지했다.
정치 제도 면에서도 발해는 고구려의 5경 15부 체제를 발전시켜, 중앙 집권화된 행정 시스템을 확립했다. 이는 중국식 제도를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식 지방 통치 방식의 유산을 조화롭게 활용한 사례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조는 고구려 귀족들이 중심이 된 통치체계와 일맥상통하며, 계승의식의 실체를 보여준다.
한편, 당나라는 발해를 말갈의 나라로 규정하고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인식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발해가 군사력과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확보하자 결국 ‘발해국왕’이라는 공식 칭호를 승인하였다. 이는 고구려의 후손 국가로서 발해의 지위를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 결과로 해석된다.
문화, 제도, 지배층 구조 속 고구려의 흔적
발해는 문화와 사회 구조 면에서도 고구려의 유산을 충실히 계승했다. 대표적인 예가 발해 귀족층의 복식과 무덤 양식, 왕실 제례 방식 등에서 나타난다. 발해 귀족의 복장은 고구려식 복장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고분벽화 역시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굴식돌방무덤과 벽화 양식은 평양 고구려 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보인다.
또한 발해의 불교문화는 고구려의 종교 전통을 이어받아 국교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발해는 수도 상경용천부에 대규모 불교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제작하며, 불경을 유통시켰다. 고구려에서 전해 내려온 승려 교육 체계도 그대로 이어졌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불교 계통의 연속성이 확보되었다.
지배층 구성 또한 고구려 계승의식의 핵심이다. 발해 초기 지배 귀족은 대부분 고구려계 인물로, 왕족과 중앙 관리 대부분이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 이들은 말갈 출신과는 차별화된 특권 계층으로 작용했으며, 이러한 귀족 사회는 발해 후반기까지 유지되었다. 이는 발해가 단순히 다민족 국가가 아닌, 고구려인의 정치적 주도권이 유지된 국가였음을 반영한다.
심지어 발해 멸망 이후, 발해 유민 상당수는 고려로 귀화했으며, 고려는 발해를 고구려의 후손으로 받아들였다. 《고려사》에는 발해를 "고려의 옛 땅에 세워진 형제의 나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발해가 단절된 국가가 아니라, 고구려-발해-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의 일부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부활이었다
발해는 단지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와 정신을 실질적으로 계승하고 부활시킨 국가였다. 건국의 주체, 정치 제도, 외교 인식, 문화유산, 사회 구조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흔적은 발해 전역에 깊이 새겨져 있었다.
오늘날 한국사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후계국으로 인식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적 자부심이 아니라, 수많은 역사 기록과 실증적 증거에 기초한 평가이다. 고구려의 기상을 계승한 발해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북아 고대사의 흐름을 통찰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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