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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년 일본이 조선을 흔든 운요호 사건

pingmoney 2025. 5. 27. 16:27

1875년 일본 해군의 군선 운요가 해안 탐사를 빙자해 강화도와 영종도를 습격하고 민간인 학살과 약탈, 방화 등의 공격을 행한 사건. 이듬해인 1876년에 강화도 조약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이 사건을 시작으로 멸망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1875년 일본이 조선을 흔든 운요호 사건에 대해 작성하겠다.

1875년 일본이 조선을 흔든 운요호 사건
1875년 일본이 조선을 흔든 운요호 사건

운요호 사건의 배경

일본은 1868년에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자국을 봉건적 막부 체제에서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 체제로 전환시키며, 그 일환으로 주변국들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식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내자 일본으로도 서구 열강을 따라 제국주의가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구시대적 사농공상 신분제가 철폐되며 경제적·사회적 특권을 잃은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이 활약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나길 원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을 재침공하자는 정한론도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조선을 개항시켜 무역 소득을 얻고, 필요하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자는 여론이 강해졌다.

쿠로후네 사건을 계기로 1854년에 서구 열강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조선에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운운하며 상호 통상을 요구했지만, 당시 조선의 실권자는 철저한 쇄국 정책을 고수했던 흥선대원군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가 아닌 국가들과의 교류를 엄격히 금지했고, 이와 반대되는 행보를 보인 일본에게 적개심과 불편함을 감추지 않았다. 게다가 1869년에 메이지 정부의 서계(국서)를 받은 조선 정부는 일본이 천황 등 청나라나 사용할 수 있는 황제의 용어를 쓴 것, 그리고 예전에 조선이 준 도서(圖署)가 아닌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에 심히 불쾌해하며 서계를 접수하지 않고 반환했다. 그렇게 조일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간 건 물론 일본의 정한론에도 힘이 실리고 있었다.

1873년 일본에서는 정한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메이지 6년 정변으로 정한론 강경파가 실각하고 온건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정한론을 잠재우고자 1874년에 대만으로 소규모 원정을 보내기도 했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의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통상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1874년 8월 청으로부터 "일본이 대만 원정에 준비했던 5000명가량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할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조선이 미리 미국과 프랑스와 통상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내용의 비밀문서를 받았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으나, 결국 일본과의 교섭이 결정됐다.

1875년 2월 조선은 일본의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4]가 가져온 새로운 서계를 받아보았다. 조선의 요구대로 서계에서 '천황' 같은 단어는 빠졌지만 조선 조정을 자극할 만한 '대일본' 같은 용어가 사용됐음에도, 외교적 해결에 대한 고종의 의지가 강했기에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의 위정척사파들이 이를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으로 서양식 의복)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했다. 그렇게 교섭에 난항을 겪자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조선을 압박하기 위한 군함 파견을 요청했고, 일본 내부의 강경파는 외무경 이와쿠라 도모미,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 등의 동의를 얻어 1875년 5월에 운요호를 포함한 두 척의 군선을 부산으로 파견했다. 부산에서의 도발과 무력시위가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같은 해 9월 운요호는 단독으로 강화도에 무단 침입하여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를 운요호 사건이라고 한다.

일본 해군의 습격으로 인한 교전

1875년 5월 25일과 6월 12일에 일본 해군의 운요호와 다이니테이보호가 부산에 각각 도착했다. 운요호가 부산항에 오자 당시 '부산 훈도'였던 현석운이 부산 주재 왜관을 항의 방문해 군선 침투 사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 소좌는 '일본과 조선 간의 통상을 위해 방문한 것이며 조선의 해안을 탐사하러 왔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이 두 척의 함선은 부산 앞에서 포격 연습을 하며 무력시위를 벌였고, 심지어 운요호는 동해안을 측량하고 영흥만과 영일만 일대에 상륙하기도 했다.

일본은 조선이 무력시위에 굴복하거나 도발에 넘어가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판단했던 듯한데, 조선은 일본의 의도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미 일본과 문제 될 거리를 만들지 말라는 고종의 명을 받았던 부산의 관리들은 일본 함선에 선공을 가할 의사가 없었고, 조선 조정은 무력시위 이후에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이후에도 협박이 있을 때마다 양보해야 할 것이라며 일본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교섭을 결렬시켰다. 사실 일본의 판단과는 다르게 타국의 영토를 무단으로 측량하는 것은 서양의 국제법에서도 불법이기 때문에, 만약 조선이 공격했어도 나중에 조선이 외교적으로 불리해지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중에 강화도에서 2차 도발을 할 때는 수법을 바꾸어 식수를 얻으러 왔다고 둘러댔는데, 이것조차도 후술된 것처럼 일본의 조작으로 판명됐다.

부산에서의 1차 무력시위를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간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해군성에 조선 침공을 건의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운요호를 일본 열도의 최북단인 홋카이도로 배치하려 했다. 홋카이도로 가는 도중 해군에 탄원한 이노우에는 결국 해군대보 가와무라 스미요시로부터 운요호의 목적지를 청나라의 잉커우로 변경한다는 허락을 얻어낸다.

9월 20일, 운요호는 잉커우로 가는 길에 굳이 현재의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도달했다. 이노우에를 포함한 일부 승조원들이 단정을 타고 강화도의 초지진으로 접근했는데, 때마침 경계를 서고 있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 단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단정을 향해 돌아가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경고 포격을 가했고 단정은 이에 맞서 소총으로 응사한 후 운요호로 돌아갔다.

운요호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본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정확한 전말을 알기 어려우나, 일본의 역사가들은 마치 노구교 사건에서의 무타구치 렌야처럼 해군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본다. 반면 한국의 학자들은 행간의 맥락을 추정해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후 결과

9월 28일에 나가사키로 귀항한 함장 이노우에 소좌는 사건의 경위를 담은 보고서를 제출했고 10월 8일 해군성은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운요호는 급수를 목적으로 우발적으로 강화도에 정박했고 교전 당시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있었으며 모든 전투는 9월 20일 하루 동안 발생했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앞뒤가 안 맞는 게 많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왔고, 이후 이노우에가 나가사키에 귀항한 다음 날인 9월 29일에 작성한 최초의 보고서가 2002년에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발견되면서 조작으로 판명됐다. 이 최초 보고서에 기록된 진실은 운요호는 의도적으로 강화도에 접근했으며, 물이 아닌 해안 측량과 조선 관리와의 면담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첫날인 9월 20일에는 일본 국기를 게양하지도 않았고, 모든 전투는 하루가 아닌 3일 동안 벌어졌다. 이노우에가 보고서를 이렇게 날조한 이유는 운요호의 행동이 국제법에 어긋난다는 걸 뒤늦게 알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서양 주도의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위신을 세우는 것을 매우 중시했기에 운요호의 군사 행위가 국제법상 용납될 수 없는 도발로 간주되는 건 곤란했다. 당시 국제법에 의하면 운요호가 한 것처럼 무단으로 타국의 해안을 측량하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지만 식수가 떨어졌을 때는 당사국의 허가 없이도 아무 항구나 들어갈 수 있었기에 이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또한 군함이 타국 영해에서 3일이나 있는 것은 일본이 먼저 선전포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3일도 하루로 줄였다. 한국에서의 연구에 따르면 보고서 제출 후 발표 전에 이노우에의 보고서를 먼저 읽어보고 조작에 대한 자문을 한 것은 외교관인 모리야마 시게루와 이토 히로부미로 추정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온건파가 장악하고 있었으나, 이렇게 조작된 보고서로 인해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라고 왜곡되면서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게다가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도 국력을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조선 출병 자체는 긍정적이었는데, 이들은 조선이 아니라 그 뒷배인 청나라,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 이에 눈독을 들일 서구 열강들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일단 조선과 청에 외교 사절을 보내서 문제를 따져보고 외교적 해결에 실패할 경우 조선을 침공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일본은 부산에 3척의 군함을 보내 무력시위를 했으며, 이어서 1876년 2월에는 강화도로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함선을 보내 조선에게 이 사건의 책임을 지기를 요구했다. 일본의 이런 과격한 행동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의 도움을 원했으나, 당시 제 코가 석 자였던 청나라는 운요호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선 외교 대표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개항시켰다. 그것도 자신들이 쿠로후네 사건 때 당했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해, 거의 똑같이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끔 하였다. 이 사건 이후로 조선의 멸망이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에, 조선 멸망사를 배울 때 중요한 사건들 중 하나로 꼽힌다.

운요호 사건이 남긴 유산

당시 조선은 무력 충돌을 통해 국권을 지켰으나, 이러한 방식은 점점 더 한계를 드러냈다. 운요호 사건은 쇄국과 개방 사이의 선택이 불가피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으며, 조선이 외교적으로 대응할 준비가 부족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오늘날 운요호 사건을 되짚는 것은 조선 후기 국제 정세 속에서의 외교 전략, 자주권, 근대화의 필요성을 반추하는 데 의미가 있다. 특히 현재 국제 질서에서도 한 나라의 문화와 주권을 지키면서도 세계와의 소통을 모색하는 외교적 균형의 중요성을 시사하는 사례로 평가된다.

 

참고 : https://namu.wiki/w/%EC%9A%B4%EC%9A%94%ED%98%B8%20%EC%82%AC%EA%B1%B4